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총검 돌격 (문단 편집) == 등장배경 == 중세 말에 [[총]]이 전장의 주역이 되었지만 [[머스킷|당시 총]]은 정확도나 재장전 시간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특히 재장전은 아무리 숙달되어도 1분에 2발 쏘기가 힘들었고, 적이 근접해 백병전이라도 벌이면 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는 [[ 테르시오]]의 창병처럼 냉병기로 무장한 보조병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총기 사용자들은 자신의 총에 무거운 손잡이나 칼 가끔은 '''도끼나 창'''을 끼워서 백병전에 대비했고 각국 군대들도 총병이 창병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 결과 1600년대 쯤 머스킷총에 끼울 수 있는 단검인 [[총검]]이 등장하고, [[전열보병]]들은 일제사격으로 몇 발을 쏜 후에 총검이 달린 머스킷을 들고 돌격해서 백병전으로 전투의 마무리를 지었는데 이 백병전이 총검 돌격의 시작이었다.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전쟁]]까지 아무리 머스킷이 발전했다지만 발사 속도는 1분에 2~3발 정도였기에 총검 돌격 전술은 보병전술의 핵심중 하나였고, 총검 훈련이 잘된 군대가 숫적열세를 극복하고 총검 돌격으로 이기는 사례가 허다해서 각국 보병장교들, 특히 [[프랑스군]]이 착검 돌격을 죽어라 훈련시켰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몇몇 전투에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 예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라첸 고지로 돌격한 술트 휘하의 사단은 고지를 점령한 후 총알이 떨어지자 반격을 위해 올라온 오스트리아군을 총검 돌격으로 갈아버려 고지를 사수, 전투를 승리로 이끈바 있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부터 총은 엄청나게 진화해서 [[강선]]과 [[미니에 탄]]을 통해 과거 머스킷의 약점인 명중률과 재장전 속도를 상당히 극복했으며, 1800년대 후반이 되면 후장식 소총과 [[탄피]]가 발명되면서 냉병기를 이용한 총검 돌격은 구식전술이 되어갔다. 병력 태반이 강선 머스킷과 미니에 탄으로 무장했고 소수의 자동화기가 도입된 [[남북전쟁]]시기에도 개활지에서 적진에 돌격하는건 미친짓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북군 8,000이 돌담을 향해 돌진하다 사상당했고, [[게티즈버그 전투]]에선 피켓의 돌격으로 남군 5,000가량이 사상, 4,000가량이 포로로 잡혔을 정도였다. 물론 자동화기의 미비로 인해 총검 돌격이 아주 의미가 없었던건 아니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분수령이었던 리틀 라운드 탑에서 [[조슈아 체임벌린]] 대령이 총알이 떨어진 상황에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올라오던 남군 연대를 상대로 착검돌격하여 고지 점령 시도를 완전히 무마시켰다.유명한 착검돌격이라 게티즈버그 전투를 묘사하는 매체에 반드시 들어가는 장면 중 하나. 그러나 이미 언급되었듯이 탄약이 바닥나자 마지막 발악으로 총검 돌격을 감행한 것으로서 달리 말하자면 계속해서 리틀 라운드 탑을 오르던 남군은 체임벌린 대령의 메인 연대가 보유한 탄약이 바닥나도록 얻어맞았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몇 번이나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계속 쉴 틈도 없이 산을 타며 '공격-후퇴-재집결-공격'이라는 무한루틴을 돌던 남군의 사기와 체력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반면 몇 번이고 남군을 격퇴시킨 메인 연대는 탄약이 떨어진 와중에도 사기가 높았다. 이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총검 돌격이 제대로 먹힌 것. 그러나 시대의 흐름으로 인해 남북전쟁이 진행됨에따라 북군의 연발총 보유 비율이 남북전쟁 후기에 들어서며 점차 증가했다. 흔히 카우보이총, 리피터라고 부르는 [[레버액션]] 소총과 [[볼트 액션]] 소총이다. 또 아직 기관총이라곤 초기 [[개틀링 기관총|개틀링]]밖에 없는 시대였음에도 '''원시적인 [[참호전]]'''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미 1860년대부터 한계를 보이고 있었던 것. 가장 결정적으로 총검 돌격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현대식 '''[[기관총]]'''의 발명이였다. 방아쇠만 당기고 있으면 분당 수백 발의 탄환을 발사하는 기관총 때문에, 개활지에서 벌어지는 섣부른 총검 돌격은 그야말로 죽으러 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전쟁의 전훈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때 유럽 고급장교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총검돌격이 박혀있었고 그 결과 전쟁초기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서부전선 [[참호전]]의 진상. '''어디까지나 초기다.''' 개막장으로 유명한 1차대전도 이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지만, 전차의 등장 전까진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은 '''참호 난입을 위한 일제 돌격 말곤 없었다.''' 심지어 터널전쟁으로 상대방 참호 밑을 폭파해도 결국 진입하기 전까진 적의 포화와 살아남은 적 기관포대 및 일부 보병을 뚫고 나가야 한다. 그나마 [[갈리폴리 전투]]에선 [[오스만 제국]]군이 시도하여 비록 성공은 하지 못했어도 영연방 연합군에게 꽤 큰 타격을 준 바 있다. 오스만 제국군 57연대가 무기가 떨어지자 너죽고 나죽자 돌격한 것이었는데, 결국 전 연대원이 전멸하였지만 이들의 돌격에 고전한 연합군이 물러선 덕분에 오스만 제국군 다른 부대는 새로운 보급을 받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57연대는 영웅적인 전공을 보인 부대로 추앙받아 현재 [[터키]]에서도 전설적인 부대로 남게 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 총검돌격이지, 좁아터진 참호 안에서는 1미터 반은 되는 창을 휘두를 공간이 있을리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총을 던져버리고 [[트렌치 클럽]], 야삽, 몽둥이 같은 급조 둔기로 백병전을 벌이거나 장교 시체 뒤져서 득템한 권총을 쏴버리는게 대부분이었다. 굳이 총검을 쓸 때라면 참호 위에서 참호안에서 싸우고 있는 적군을 콕콕 찔러줄 때 정도였는데. 그 짓을 계속하고 있다간 적 기관총에게 벌집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전술적으로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이 전술이 성공하려면 대체로 3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3가지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아군의 사기와 훈련이 적보다 월등할 것''' >'''2. 충분한 화력지원 및 공중지원이 있을 것''' >'''3. 아군의 접근을 적군이 인지하지 못할 것''' 물론 체임벌린의 돌격처럼 세가지 조건이 전부 미비한데, 기세와 예측하지 못한 아군의 기동으로 적이 혼란하여 패주한 경우도 있긴 하다. 일반적인 경우에 이 정도의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이면 '''이미 이겼다는 소리다.''' 통상작전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총검돌격이란 이미 이긴 상태에서 승리를 굳히거나, 탄약의 고갈 등 불리한 상황에서 사용할 '''마지막 수단'''이 된 것이다. 이마저도 훈련된 병사 한명 한명의 가치가 더더욱 높아진 현대에서는 굳이 멀쩡한 총을 놔두고 목숨을 내놓고 돌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무시하고 군사적 가치만 보더라도 총알 그까이꺼보다 사람 몇명 더 살아 있는 게 더욱 유용하다. 그래서인지 이 정도로 전술적 우위가 벌어지면 불리한 쪽이 먼저 항복하거나 유리한 쪽이 항복을 권유하는게 보통이다. 정상적인 군대에서는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부대의 탄약 재고를 항상 체크하며, 탄약이 떨어지는 상황이 올것을 미리 예측하고 보급을 받거나, 그게 안되면 차라리 후퇴하거나 한다. 또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 역시 '그래도 현 상황에서 총검 돌격을 하면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이길 수 있다'와 같은 때이다. '[[반자이 돌격]]'처럼 무조건 최후의 발악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총검 돌격을 한다고 해도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예상하면 처음부터 교전을 피하고 후퇴해서 다른 방법을 찾는게 더 옳다. 이는 '총검 돌격'이 현대전에서 사장된 가장 큰 이유이다. 이후 현대전에선 대체적으로 이런 공격을 지양하게 되나 최근의 몇몇 전장에서 의외의 성과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